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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죄를 정하는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시민 12인이다

미국 형사재판의 풍경은 한국과 정반대다. 법복을 입은 판사는 재판을 진행하고 법률을 설명할 뿐, 피고인의 유무죄 자체는 법정에 소집된 일반 시민 12인이 정한다. 그리고 그 12명이 전원 동의하지 않으면 유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제도는 미국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뿌리는 12세기 영국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식민지 시대의 재판 한 건이 방향을 바꿨으며, 독립선언서의 문장 하나에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배심제가 '왜' 존재하는지를 알려면 이 800년의 궤적을 따라가야 한다.

시작은 왕의 행정 장치였다 — 헨리 2세와 마그나카르타

배심의 제도적 기원으로 꼽히는 것은 12세기 영국 헨리 2세의 개혁이다. 그는 토지 분쟁을 해결할 패널로 '자유롭고 합법적인 12인'을 세웠고, 범죄를 고발하는 '제시 배심(presenting jury)'도 뒀다. 오늘날 기소 여부를 정하는 대배심의 전신이다. 이 단계의 배심은 시민의 권리라기보다 왕이 지방의 사정을 파악하고 분쟁을 처리하기 위한 행정 장치에 가까웠다.

초기의 배심원들은 지금과 달리 사건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조사해 판단하는 '자기 정보형' 배심이었기 때문이다. 전환점은 1215년 마그나카르타였다. 배심재판이 영국에서 권리로 확립됐고, 이후 배심은 점차 사건을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라 재판에서 제시되는 증거를 듣고 판단하는 집단으로 변해 갔다.

식민지로 건너온 배심 — 1623년 플리머스의 칙령

배심제는 영국 이주민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넜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도착 3년 만인 1623년 12월 17일, '모든 형사 사실과 사람 사이의 침해·채무는 선서한 12인의 정직한 자들의 평결로 재판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본국의 관습법 중에서도 배심만큼은 가장 먼저 법전으로 옮겨 적은 셈이다.

1630년에는 식민지 최초의 배심재판으로 기록된 사건이 열렸다. 동료 이주민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존 빌링턴의 재판으로, 배심은 '명백하고 악명 높은 증거에 의한 고의 살인'으로 유죄를 평결했고 교수형이 집행됐다. 배심제는 식민지 생활의 첫 10년 안에 이미 형사재판의 기본값이 돼 있었다.

1735년 젱어 재판 — 배심이 총독에게 맞서다

1735년, 뉴욕의 출판인 존 피터 젱어가 식민지 총독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선동적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법리로는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어도 항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변호인 앤드루 해밀턴은 배심을 향해 '진실은 명예훼손의 항변이 된다'고 주장했고, 배심원장 토머스 헌트는 '무죄'라고 답했다.

이 재판이 남긴 것은 무죄 자체보다 선례의 방향이다. 법과 권력이 유죄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건에서도,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이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식민지 전역에 알려졌다. 배심은 왕의 행정 장치에서 출발했지만, 이 무렵부터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로 읽히기 시작했다.

독립선언서에까지 적힌 권리

영국 본국도 배심의 힘을 알고 있었다. 식민지 배심원들이 인기 없는 항해법 위반 사건에서 유죄 평결을 거부하자, 영국 정부는 사건을 배심이 없는 해사법원으로 옮겨 처리했다. 배심을 우회해 법 집행을 관철하려 한 것이다.

이 경험은 1776년 독립선언서에 그대로 새겨졌다. 선언서는 영국 국왕의 죄목 중 하나로 '많은 경우 우리에게 배심재판의 혜택을 박탈했다'는 문장을 명시했다. 배심재판은 독립의 명분을 구성하는 권리 목록에 들어간 것이다.

헌법에 새겨지다 — 제3조와 수정헌법 제6·7조

독립 후 배심은 헌법 본문에 자리 잡았다. 연방헌법 제3조 제2절은 '탄핵 사건을 제외한 모든 범죄의 재판은 배심에 의한다'고 정했다. 이어 1791년 12월 15일 비준된 권리장전이 내용을 채웠다. 수정헌법 제6조는 모든 형사 기소에서 피고인에게 '신속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공정한 배심에 의해 받을 권리'를 보장했고, 수정헌법 제7조는 분쟁 금액 20달러를 넘는 관습법 민사 소송에서도 배심재판 권리가 보존된다고 정했다.

건국 당시 정리된 배심의 기본형은 이렇다.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단면으로 의도된 시민 12인, 법원이 적용 법률을 설명하고, 평결은 만장일치. 단, 여기에 큰 단서가 붙어 있었다. 배심원 자격은 백인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지역사회의 단면'이라는 설계와 실제 구성 사이에는 처음부터 간극이 있었던 셈이다.

미국 배심제 800년 연표

시기사건의미
1154~1189년헨리 2세, '자유롭고 합법적인 12인' 패널과 제시 배심 제도화배심의 제도적 기원 (대배심의 전신)
1215년마그나카르타배심재판이 영국에서 권리로 확립
1623년플리머스 식민지 칙령 (12월 17일)식민지 법전에 배심 명문화
1630년존 빌링턴 살인 재판식민지 최초의 배심재판으로 기록
1735년젱어 재판 무죄 평결배심이 권력에 맞설 수 있음을 보인 사건
1776년독립선언서배심 박탈을 국왕의 죄목으로 명시
1789년연방헌법 제3조형사 배심재판을 헌법 본문에 규정
1791년권리장전 비준 (12월 15일)수정헌법 제6조(형사)·제7조(민사)
1860년매사추세츠 첫 흑인 배심원인종 장벽의 첫 균열
1880년Strauder 판결인종에 의한 배심 배제는 평등보호 위반
1950~51년매사추세츠 여성 배심원 자격·첫 착석성별 장벽 해소의 사례
1968년Duncan 판결배심재판권이 주 법원에도 적용
1975년Taylor 판결여성의 체계적 배제는 '공정한 단면' 위반
2020년Ramos 판결주 형사재판에서도 만장일치 필수로 완성

자격 확대 ① 인종 — '동등한 자들'의 약속

헌법의 문언이 넓어져도 배심석의 구성은 느리게 변했다. 매사추세츠가 1860년 흑인 배심원을 처음 위촉한 것이 그나마 이른 사례였다. 법으로 배제를 못 박은 주에서는 소송으로 다퉈야 했다.

1880년 Strauder v. West Virginia 판결에서 연방대법원은 인종을 이유로 시민을 배심원에서 배제하는 주법이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보호를 위반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든 근거는 배심의 본질이었다. '배심이란 피고인과 같은 법적 지위를 가진 동등한 자들(peers or equals)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특정 인종 전체를 그 집단에서 지워 버리는 법은, 배심제도 자체의 전제를 부정한다는 논리였다.

자격 확대 ② 성별 — 인구의 절반이 빠진 단면

성별의 장벽은 더 오래갔다. 여성은 1920년 참정권을 얻은 뒤에도 배심석에서는 배제되는 주가 많았다. 매사추세츠조차 여성의 배심원 자격을 인정한 것은 1950년이었고, 첫 여성 배심원이 착석한 것은 1951년이었다.

전환점은 1975년 Taylor v. Louisiana 판결이다. 연방대법원은 여성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배심 구성이 수정헌법 제6조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이유는 '공정한 단면(fair cross-section)' 원칙이었다. 배심원단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단면을 이뤄야 하는데, 인구의 절반에 이르는 집단을 구조적으로 빼놓은 단면은 단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이후 배심 구성 논쟁 전반의 기준이 됐다.

주 법원으로, 그리고 만장일치의 완성

또 하나의 확장은 적용 범위였다. 헌법의 배심 권리는 원래 연방 법원에 대한 규정이었고, 주 법원의 형사재판에까지 미치게 된 것은 1968년 Duncan v. Louisiana 판결이 수정헌법 제6조를 제14조를 통해 주에 적용하면서부터다. Taylor의 '공정한 단면' 원칙도 이 토대 위에 섰다.

마지막 조각은 만장일치였다. 연방 법원에서는 오래전부터 만장일치가 원칙이었지만, 루이지애나와 오리건은 주 법원에서 10대 2 평결로도 유죄를 선고할 수 있었다. 2020년 Ramos v. Louisiana 판결(6대 3)에서 연방대법원은 이 관행을 끝냈다. 12명 중 10명의 찬성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선고된 사건을 파기하며, 주 형사재판에서도 유죄는 만장일치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14세기 영국 관습법에서 시작된 원칙이 2020년에야 미국 전역의 기준으로 완성된 것이다.

자주 묻는 질문

출처

800년 동안 넓어져 온 '판단하는 시민'의 범위

배심제의 역사는 두 갈래로 읽힌다. 하나는 권리의 역사다. 왕의 행정 장치였던 배심이 마그나카르타의 권리가 되고, 독립선언서의 명분이 되고, 헌법의 문장이 됐다. 다른 하나는 구성의 역사다. 백인 남성만의 집단이던 배심석에 흑인이 앉기까지는 건국 후 70년이, 여성이 앉기까지는 160년이 걸렸고, 만장일치 원칙이 전국의 기준이 되기까지는 2020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들어진 배심제는 실제로 판결을 어떻게 바꾸는가. 시민 12인의 합의 구조가 판사 한 사람의 판단과 무엇이 다르고, 그 간극을 줄인다는 평가와 오히려 감정에 휘둘린다는 비판이 왜 함께 존재하는지는 2편 '배심제도가 국민 감정과 동떨어진 판결을 줄이는 구조'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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